[한겨레] ‘나의 아픔은 나의 강점', 회복의 롤모델이 된 청소년들

‘나의 아픔은 나의 강점’…또래 치유 나선 청소년들


자해·우울 딛고 ‘아픔의 경험 전문가’로

학교폭력·가정폭력 겪은 청소년들
심리적 지원가로 키워지는 교육 받고
자신의 경험 오픈하며 손 내밀어
국회·학술대회 등에서 정책적 제안도

2019년 국회에서 열린 자살예방 종합학술대회에서 피어 스페셜리스트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2019년 국회에서 열린 자살예방 종합학술대회에서 피어 스페셜리스트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조수현(21)씨는 “치료받지 못한 채 스무살이 되었다”고 말한다.


조씨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불화와 가정폭력을 겪었다. 어떤 날은 너무 맞아서 학교에 못 가는 날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폭력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면을 쓰고 숨기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공허함과 동시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오래전부터 우울을 느꼈지만 이 감정을 무력함과 게으름으로 착각했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우울증 간이 검사를 해보고선 자신이 심각한 우울 상태라는 걸 알았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며 치료를 요구했지만 ‘예민한 애’로만 취급했고, 조씨가 신청한 지역의 무료 상담도 끊어버렸다. 부모님께 우울증 약을 처방받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정신과 약을 복용한 사실이 기록에 남고 싶냐’는 잘못된 정보만 내세우며 조씨의 요구를 거부했다.


우가은(17)양은 우울증과 불면증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심각한 학교폭력을 겪으면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진행한 심리검사에서 우울증이 의심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상담실에 불려갔지만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선생님은 우양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이 말을 했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통보했다.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우양은 겨우겨우 사정해서 간신히 부모님께 연락이 가는 걸 막았다. 그때부터 우양은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아프지만 즐겁고,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척해야 했다.


강지오(18)양은 초등학교 시절 심각한 학교폭력을 겪었다. 아버지의 첫 반응은 “네가 뭘 잘못한 거 아냐?”였고, 학교 선생님들은 ‘학폭위’를 열면 모두가 힘들어지니 좋게 좋게 끝내자면서 화해만 종용했다. 그때부터 강양의 자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해는 도피처였고, 자해했을 때 기분이 더 나아졌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심리검사 결과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자, 부모님은 강양을 데리고 상담소와 정신과에 끌고 다녔다. 자녀의 마음에 대한 수용이나 공감이 없는 부모님의 강제적인 치료는 오히려 강양으로 하여금 가출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10대와 2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며 청소년의 자해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치유의 길은 멀다. 어떤 부모는 ‘너무 예민한 네가 문제’라며 스스로 해결할 것을 종용하고, 어떤 부모는 원치 않는 방법으로 치료를 강요한다.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고 싶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정신과 치료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고, 학교의 상담 내용도 아이가 원치 않게 부모에게 전해지면서 아이들은 점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된다.



2019년 피어 스페셜리스트들이 주관한 청소년 정신건강 인식개선 캠페인 바바피크닉의 모습.
2019년 피어 스페셜리스트들이 주관한 청소년 정신건강 인식개선 캠페인 바바피크닉의 모습.



“또래와 아픔 이겨내는 게 나를 치유”


만약 비슷한 아픔과 고통을 먼저 겪은 또래가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토닥거려준다면 어떨까? ‘멘탈헬스코리아’는 이러한 생각의 씨앗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2018년 설립된 멘탈헬스코리아는 카이스트에서 ‘사회적 기업가 엠비에이(MBA)’ 과정을 밟던 최연우씨와 장은하씨가 의기투합해 만든 비영리기관으로, 정신건강 서비스의 소비자 권리 강화와 사회적 인식 개선을 목표로 하는 사회사업들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14∼25살 대상의 ‘피어 스페셜리스트’를 키워내는 ‘피어 스쿨’이다. 피어 스페셜리스트(Peer Specialist)란 ‘아픔의 경험 전문가’라는 뜻이며, 피어 스쿨은 자해·자살충동·우울·불안 등을 겪은 청소년·청년들을 교육시켜서 또래의 심리적 지원가이자 정신건강 서비스의 소비자로서 권리를 강화하고 공공정책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당사자 전문가로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멘탈헬스코리아는 지금까지 총 150여명의 피어 스페셜리스트를 키워냈다. 이들은 인터넷과 유튜브 등에서 자신의 경험을 오픈해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국회 자살예방 포럼 및 정신의학회 학술대회, 교육부 정신건강 심포지엄 등에서 발표를 통해 당사자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활동해왔다. 에스엔에스 등에서 자살이나 자해 등의 위험 신호가 보이는 또래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기도 하고, 지난해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선 사연을 묶어 <우리의 상처는 솔직하다>(마음의숲)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조수현씨, 우가은양, 강지오양 모두 이곳에서 피어 스페셜리스트로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조수현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19년 인터넷에서 청소년 참여 프로그램을 찾아보던 중 ‘아픔이 강점이 될 수 있다’는 문구에 마음이 끌려서 피어 스쿨의 문을 두드렸다. “나의 상처를 숨겨야 되는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당당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강연과 인터뷰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신청하게 됐다”는 그는 그해 여름방학 동안 비슷한 상처를 가진 또래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픔의 전문가’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주도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안전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고, 그렇게 솔직하게 또래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털어놓고 인정받은 게 처음이라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며 “내 상태가 좋아지는 데 큰 계기가 되었고 나를 믿게 되어 내 능력을 확장시키게 되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현재 대학에서 정신간호 동아리 회장을 맡으면서 정신건강 쪽으로 진로를 잡아 나아가고 있다.


우가은양도 중학교 1학년 때 “에스엔에스에서 ‘당신의 상처가 강점이 될 수 있다’는 피어 스쿨의 문구를 보고 딱 나에게 맞는 문구여서 신청했다”고 말했다. 지방에 사는 우양은 케이티엑스를 타고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을 오가며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교육을 받기 전에는 그냥 아픈 기억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교육을 받으면서 그 아픔 덕분에 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이 교육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말한다. 이후 우양은 국회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의과대학, 청소년 정신건강 페스티벌 등 다양한 곳에서 연설과 발표를 했고,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는 또래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등 피어 스페셜리스트로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내가 힘들었을 때 주변의 공감을 못 받아봤기 때문에, 아픔이 있는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이겨내는 걸 보는 게 저에게 큰 힐링이 된다”며 “지금 고등학생이라서 학업과 병행하기에 시간이 많이 들긴 하지만, 공부에서 얻는 배움보다 이 일을 하면서 얻는 깨달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계속 해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지오양은 유튜브에 ‘청소년 자해’를 검색하다가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커서 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고 한다. 학교를 자퇴하고 고립감을 느끼던 그에게 이 교육은 소속감, 유대감뿐 아니라 막연하게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진로도 구체화해줬다. 원래는 취업을 생각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간호학을 전공해서 정신과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그는 “이 활동들을 통해서 제 삶의 의미를 찾은 거 같다”며 “어딘가에서 나를 찾아주고 불러주고 내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데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멘탈헬스코리아의 피어 스쿨 참여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멘탈헬스코리아의 피어 스쿨 참여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다음 달 온라인 피어 스쿨 시작


오프라인으로 교육을 해온 멘탈헬스코리아는 5월부터는 전국으로 교육 대상을 확대하기 위해 온라인 과정으로 피어 스쿨을 운영할 예정이다. 이달 중으로 누리집(mentalhealthkorea1.modoo.at) 등에 지원자 모집 공고가 나가며, 서류와 면접 등을 거쳐 교육 대상자를 결정한다. 장은하 멘탈헬스코리아 부대표는 “어떤 아픔을 얼마나 겪었는지보다 성실성을 중요하게 본다”고 말했다. 교육 비용은 무료이다. 교육 과정은 4주 기초 과정부터 시작해서 더 높은 수준의 전문가와 활동가가 되기까지 총 3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이외에 멘탈헬스코리아는 올해 안에 다양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성화할 계획이다. 자해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 조현병 환자를 두고 있는 가족들, 자살 유족들, 가정폭력·학교폭력 피해자 등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형성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들을 하나씩 오픈한다고 멘탈헬스코리아 쪽은 밝혔다.


글 김아리 기자 ari@hani.co.kr, 

사진 멘탈헬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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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one should face a mental health challenge alone.'